
런던에서 삼성전자 DR을 거래하며 배운 첫 번째 원칙
주식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이왕 투자한다면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었다. 수익을 낼 방법을 찾아 유튜브 강의를 보고 책을 읽었다.
각종 기술적 보조지표를 접할 때면, 그것만 제대로 이해하면 매수와 매도 시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보조지표 공부에 몰두했고, HTS에 조건검색식을 만들어 투자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표를 하나씩 알아갈수록, 차트 밖에서 벌어지는 일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매수 신호라도 시장 전체가 상승할 때와 하락할 때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기업의 실적이 좋아도 정책이나 수급이 바뀌면 주가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이 블로그의 ‘기술적 분석’ 첫 글은 차트의 선이나 지표를 설명하는 대신, 차트를 보기 전에 무엇을 살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려 한다.
그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경험이 있다. 1994년, 런던에서 삼성전자 DR을 거래하던 시절의 일이다.
채권을 거래하던 내가 DR을 매수하다
당시 나는 회사 런던 지점에서 채권 투자를 담당하고 있었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계 발행자의 해외 증권을 뜻하는 코리안 페이퍼(Korean Paper·KP)가 활발하게 거래되던 시기였다. 국내외 증권사들은 이런 증권을 한국계 금융기관에 중개했다.
나도 그 시장에서 삼성전자 CB(전환사채)와 DR(주식예탁증서)을 거래했다. 처음에는 CB를 거래했고, 이후 DR로 투자 범위를 넓혔다.
채권 업무에 익숙했던 내게 CB는 비교적 이해하기 편한 상품이었다. 발행회사의 신용도와 매입가격, 이자와 만기 상환조건을 바탕으로 수익률을 검토할 수 있었다. 여기에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어 있어, 전환 대상 주식의 가격이 오르면 추가 수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CB도 중도에 매도하면 시장가격에 따라 손익이 달라지고, 발행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래도 당시 나는 회사가 약정대로 상환하고 만기까지 보유한다는 전제 아래, 수익을 판단할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DR은 달랐다.
DR은 주식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거래하도록 만든 증서다. 일반적인 채권처럼 만기에 약정된 금액을 돌려받는 구조가 아니었다. 바탕이 되는 주식의 가격이 떨어지면 그 위험을 그대로 안게 됐다.
그 차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과, 가격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때 대응할 준비를 갖추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10%의 차이’가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
1994년 내가 거래한 삼성전자 DR은 우선주를 바탕으로 한 상품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매수 당시 우선주와 보통주의 가격 차이가 약 10%였다. 나는 우선주가 보통주보다 배당에서 조금 유리한 대신 의결권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같은 삼성전자 주식이고 우선주는 배당도 조금 더 받는다. 의결권이 없다는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가격 격차는 지금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의 가격 차이를 앞으로도 유지될 기준처럼 받아들였던 것이 문제였다.
왜 그 차이가 10%인지, 어떤 변화가 생기면 더 벌어질 수 있는지 충분히 따져보지 않았다. 삼성전자라는 기업에 대한 믿음이 내가 매수한 상품의 가격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시장은 내 가정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보통주와 우선주의 가격 차이는 40% 수준까지 벌어졌다.
당시 보도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1994년 9월 한국경제 기고문은 삼성전자 보통주와 우선주의 가격 차이가 43%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이 수치는 두 주식의 가격 차이를 뜻하며, 우선주의 해당 기간 하락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1994년 9월 23일
기업의 우수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주가
당시 우선주 약세의 배경으로 여러 요인이 거론됐다.
대기업 출자한도가 강화되면 기업들이 의결권 없는 우선주부터 매각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전환사채가 우선주로 전환되면서 공급이 늘어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주가지수 선물 도입을 앞두고 지수 산정에 포함되지 않는 우선주는 기관투자가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기관의 매도와 투자자들의 불안이 하락을 키웠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서울신문의 「우선주 파동 무엇이 문제인가」 기사에 정리돼 있다. 서울신문, 1994년 9월 6일
당시 제기된 분석과 소문을 모두 확정된 사실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실제 매수와 매도에 영향을 줬다.
나는 삼성전자라는 기업과 우선주의 배당조건을 보고 있었다. 그 사이 시장에서는 우선주를 보유하려는 이유와 매도하려는 이유가 달라지고 있었다.
기업 자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그 주식을 둘러싼 수요와 공급은 달라질 수 있었다.
정책과 제도, 기관의 투자전략, 시장 참여자의 기대가 바뀌는 상황을 개별 기업의 우수성만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놓친 것은 기업 바깥에서 일어나는 변화였다.
런던의 새벽, 주가가 하루의 기분을 결정했다
영국의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동안 서울은 런던보다 여덟 시간 빨랐다. 서울에서 주식시장이 열릴 무렵이면 런던은 아직 깊은 새벽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시세를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집에서 본점 딜링룸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삼성전자 우선주 가격을 물었다.
주가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면 출근하기가 싫었다. 반대로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면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서울 시장에서 움직이는 숫자가 런던에 있는 내 하루의 기분을 결정했다. 그렇게 일희일비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상반기에 쌓아 올린 좋은 실적은 DR 거래를 시작한 지 몇 주 만에 사라졌다.
그런데도 나는 한동안 처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회사의 주식인데, 이 정도로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맞는가.’
돌아보면 나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하기보다, 시장이 내 생각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식시장은 인기 콘테스트입니다”
당시 외국계 증권사 브로커가 해준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왜 추천해준 삼성전자 DR이 이렇게 떨어지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주식시장은 인기 콘테스트입니다. 시장의 관심이 높아지면 주가가 오르고, 관심이 사라지면 주가는 하락합니다.”
그 말이 주식시장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업의 이익과 현금흐름, 장기적인 경쟁력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당시 내게는 뼈아픈 말이었다. 나는 기업의 이름과 상품의 조건을 살피면서, 정작 그것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충분히 보지 못했다.
이후 내게 ‘시장의 관심’은 단순한 인기 이상의 의미가 됐다.
왜 특정 산업으로 돈이 들어오는지, 왜 기관이 어떤 종목을 줄이는지, 어떤 변화가 투자자들의 기대를 바꾸는지 살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실제 가격과 거래량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큰 그림에서 개별 종목의 차트로
이 경험 이후 나는 투자 판단의 순서를 바꾸려 했다.
종목을 발견하자마자 차트에서 매수 신호를 찾기보다, 그 종목이 놓인 환경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익히려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살펴보는 순서 | 먼저 던질 질문 |
|---|---|
| 1. 경제와 정책 | 금리·환율·정책의 변화가 투자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
| 2. 시장 전체 | 시장은 상승·하락·횡보 중 어떤 흐름이며, 자금은 어디로 움직이는가? |
| 3. 산업과 기업 | 해당 산업의 여건과 기업 실적은 어떻고, 주요 위험은 무엇인가? |
| 4. 종목의 가격과 거래량 | 앞서 살펴본 기대와 우려가 실제 주가와 거래량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
| 5. 매매와 위험 관리 | 어디에서 얼마를 사고, 예상이 틀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여기서 큰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경제를 완벽하게 예측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뉴스의 원인을 알아야 투자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투자하려는 종목에 유리한 환경인지, 불리한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무엇을 아직 모르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거시경제에 대한 내 전망 역시 틀릴 수 있다. 따라서 큰 그림을 보고 세운 판단도 개별 기업의 변화와 시장의 실제 움직임을 통해 계속 점검해야 한다.
기술적 분석은 그 판단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기술적 분석은 이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차트는 가격과 거래량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동평균선은 일정 기간의 가격 흐름을 정리해 주고, 지지와 저항은 과거 가격 반응이 나타났던 구간을 살펴보게 한다. 거래량은 가격이 움직일 때 거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확인하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지표에 매수 신호가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매매를 결정하면, 그 종목이 놓인 상황을 놓칠 수 있다. 반대로 시장 전망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가격과 거래량의 약한 흐름을 무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나는 큰 그림으로 투자 판단의 배경을 살피고, 기업 분석으로 투자 이유를 점검하며, 기술적 분석으로 매매 시점과 대응 기준을 구체화하는 방식을 익히려 한다.
예를 들어 관심 있는 기업의 실적 전망이 좋더라도 주가가 계속 하락한다면, 차트에서 반등 신호를 찾는 데만 몰두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놓친 악재가 있는지, 매도 물량이 늘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의 투자 가정이 여전히 유효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차트는 그 질문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내 판단과 시장의 움직임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기술적 분석 공부를 시작하며 내가 먼저 명심해야 할 원칙
런던에서 치른 수업료는 컸다. 그 경험이 내게 남긴 교훈은 ‘좋은 종목을 고르면 된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좋은 기업의 주식도 수급과 기대의 변화에 따라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지금의 가격 차이가 앞으로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내가 익숙한 상품에서 통했던 판단이 다른 상품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 블로그에서는 캔들, 거래량, 이동평균선, 지지와 저항 등 기술적 분석의 기본을 차근차근 살펴보려 한다. 그 공부의 출발점에 다음 원칙을 두고 싶다.
먼저 시장의 큰 그림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기업을 살핀 뒤, 개별 종목의 차트로 매매 판단을 구체화하자.
차트를 열기 전에는 “이 종목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가?”를 묻고, 매수하기 전에는 “내 판단이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 두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 내가 다시 시작하는 기술적 분석 공부의 첫걸음이다.




